'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칼럼
'갓생'을 찾아 헤매는 '갓생'들
‘갓생’ 이란 신을 의미하는 영단어 God과 인생이라는 단어를 합친 신조어로, 좋은 것을 말할 때 접두어처럼 사용되는 ‘갓’을 인생에 붙인 단어이다. 각종 인터넷 미디어에 ‘갓생’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생산적이고 계획적인 삶을 사는 것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갓생’ 살기에는 여러 가지 정해진 삶의 루틴을 따라가는 도전임을 의미하는 ‘챌린지’가 존재한다. 개중에는 이른바 ‘미라클 모닝’ 이라고 불리는,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이나 명상, 학습을 꾸준히 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MZ세대로 알려진 20-30세대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꾸준히 생산성 있는 삶을 살아내다 보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갓생’ 살기가 가져올 듯한 희망찬 결과는 사막 속 신기루에 가깝다. 21세기의 세계는 과거 그 어떤 시기보다 자본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사회다. 이전에 볼 수 없던 신 계층구조가 자본의 보유를 통해 결정되며, 자신의 노력보다 어떤 나라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부모와 조부모를 두었는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을 결정한다. 이런 세계에서 계획적이고 생산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세속적 의미의 성공으로 그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사회적 계층 분화는 자본주의의 심화로 그 격차가 벌어져만 간다. 단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조금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 조금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하는 것이, 더 많은 자본을 아무 노력 없이 상속받고 증여받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자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저문 지 오래다.
물론, ‘갓생’ 살기의 긍정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규칙적인 삶을 통해 건강한 신체를 만들고 그에 따른 건강한 정신을 가진 채로 원하는 바를 이뤄 나가며 얻는 성취감은 분명한 삶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남들을 따라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한 ‘갓생’ 살기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갓생’으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혹여 운이 좋아 계층 간의 이동 사다리를 올라갔다 하더라도, 그 후의 삶은 행복으로 채워질 수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이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가처분소득은, 행복지수의 상승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억을 가지면 100억이, 100억을 가지면 1000억이 가지고 싶어지게 만든 것이 바로 작금의 자본주의가 원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생산성 있는 삶을 살고, 매일 자신을 채찍질하며 운동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멋진 명함을 가지는 일이 주는 행복과, 한적한 시골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한량이 가진 행복은 비교될 수 있을까? 누가 더 삶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일까? 진정한 의미의 ‘갓생’을 살기 위함이라면, 나를 억지로 쥐어짜는 ‘챌린지’가 아닌, 인간과 삶에 대한 고민과 이에 이은 깊은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과거에 같은 고민을 했었던 인문학자들이 쓴 책을 읽으며 이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 나름의 답을 만들거나 깨닫게 되는 것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찟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론을 떠올려본다. 한적한 강가에 앉아 자연이 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매분 매초 들리는 반복되는 소리는 실제로 같은 소리가 아니다. 물방울이 쪼개지고 바위에 부딪히며 바람이 나뭇가지를 지나가는 소리가 복합체로 우리의 감각 기관에 닿아 뇌에서 해석되지만, 그 모든 소리 중 같은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번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는 당연한 게 아닐 수 있다. 우생학적 관점이 틀렸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은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타인이 그어놓은 기준선에 도달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서로가 필요한,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존재로서 이미 완성되어 있기에, 애초에 ‘갓생’으로 태어난 우리가 ‘갓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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