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192344
'조국의 법고전 산책' 북칼럼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을 제도화시켜놓은 것이 법이다. 하지만 그 ‘도덕’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진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법의 변화 속도가 도덕의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사회구성원의 생각이 획일화되어 있던 과거에서, 다원화되고 자유로워진 현대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은 꽤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유난히 그러하다.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매우 낮고, 정의와 공정에 대한 기대는 비관적으로 흘러간다.
50억을 퇴직금으로 받은 ‘대리’의 아버지는 아들과 경제 공동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받고, 한 버스 기사가 800원을 횡령한 것에 대하여 유죄가 선언된 사건은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80% 이상이 50억 퇴직금 사건에 대하여 부당하다고 여긴다고 한다. 검찰의 미진했던 수사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은 국민이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상식과 공정,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에 사는 민주 시민으로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과연 사법부의 신뢰도는 회복 가능한 것일까? 사법 체계와 법원의 판단 기준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주권자인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를 당시, 법고전 산책이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이 책은 몇 가지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을 가능하게 한다. 총 10장으로 이뤄진 책에서는 법고전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며, 과거에 쓰인 고전을 통해 현대의 사회에 그 내용을 적용할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해보겠다.
“평등이 목적인 것은 자유가 평등 없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고전 산책의 1장, 사회계약을 다루는 루소의 글에 등장하는 글귀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보통 사람의 잣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결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는 분명한 사법 체계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평등하지 않은 판결은 대다수의 국민에게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고, 결국 극렬한 사회적 갈등 및 더욱 살기 힘든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장에서 등장하는 추첨 민주주의가 이런 까닭으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어본다. 과거에는 입법과 사법 체계를 담당할 사람을 무작위로 뽑는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어 나오는 설명 중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보통 사람들의 능력이나 판단력을 어떻게 믿느냐고 하지만, 똑똑하다는 변호사 등 명문대 출신 전문직 출신들이 의원 대다수를 점하는 국회는 그러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중략]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똑똑한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회를 만든다.”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는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도와 시스템이 잘 갖춰진 상태라면, 권력기관의 장은 누가 되든 크게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무작위로 선출된 권력은 처음부터 권력의 의지나 권력의 연장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는 상태로 출발하기에, 그 기관이나 국가나 지역에 좀 더 충실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추첨 민주주의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외려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2장에서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것처럼, 권력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주장이다. 검찰 권력과 사법 권력의 결탁을 통해 권력 간의 견제가 이뤄지지 않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특히 더 공감되는 대목이었다. 또한, 몽테스키외의 ‘풍토론’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Chat GPT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AI등 기술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로 빠르다. 인공지능이 의사와 판사 시험을 통과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며 앞서 언급한 추첨 민주주의와 권력의 권력에 대한 견제, 그리고 풍토론 까지 결합하여 생각해 본다면, 진심으로 AI가 판사를 대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로봇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사람인 이상 존재하겠지만, 최소한 정치적 이해득실과 개인적 성취욕과 부정부패로 인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판결을 내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7장에서 루돌프 폰 예링이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라고 했으며, 9장에서 소포클레스가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했듯, 3장에서 존 로크는 인간은 폭정에서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 전체는 분명한 주인이지만, 그 전체를 고루 평등하게 대하지 않으며, 특정 집단, 특히 권력을 가진 집단만을 섬기는 주체는 교체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또한, 그 주체의 권력 아래 고개를 조아리며 평등과 자유를 내팽긴채, 법을 악용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사와 판결을 통해, 정의 구현의 미명 아래, 정치적 이득과 특정 집단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권력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2023년 2월 현재 대한민국의 무역 수지는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으며, 남북의 긴장은 커져만 가고 있다. 언급하기 힘들 정도의 외교 참사들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개를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50억 퇴직금의 무죄판결과 김학의 출국금지 관련 사건 등으로 인하여 사법기관과 수사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물가는 심각한 수준으로 오르고 있고, 물가 안정에 기여해야 할 공공기관은 도덕적 해이와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고 있다. 과거 보수 계열 정당의 집권 시 생겼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인구 집중과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율은 대학 붕괴와 돌봄 시스템의 파괴를 일으키고 있다. 그야말로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이런 현대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인 나는, 비록 일정 부분 이상의 책임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현재의 법과 제도에 떠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에 등장하는, 1장부터 10장까지의 모든 법 고전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사람과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체제나 시스템의 생김새와는 별개로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냐에 따라 국가 체계가 좌지우지된다는 것보다는, 그것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따라 결정된다고 읽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대한민국 국민을 믿고 신뢰한다. 지난 대선 결과를 보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실망감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어도 과거는 드러나 있고, 앞으로 걸어갈 길은 어떤 길을 걸어왔었는지에 달려있다. 비록 오랜 역사에 비해 시민의 손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직접 쟁취한 역사가 길지 않지만, 과거 의병 투쟁의 역사와 국난 극복을 위해 똘똘 뭉치는 대한민국 국민을 신뢰한다. 추운 겨울 늦은 밤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막아서는 경찰에게 화염병 대신 꽃을 건네고 쓰레기를 버리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수거하는 국민을 믿는다. 길가는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도우며, 고속도로에 유기견이 위험하게 돌아다닐 때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편을 감수하고 구하는 마음을 가진 시민들을 사랑한다. 해를 가린 구름은 영원하지 않다. 구름 뒤 은빛 자락을 보고 조금만 견디면 밝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솜사탕 맛 커피 (0) | 2023.05.22 |
---|---|
집단적 섬망을 물들이는 무궁화 (0) | 2023.04.12 |
호기심, 용기 그리고 MBTI (0) | 2023.03.18 |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애초에 꺾지 않는 것. (0) | 2023.02.11 |
'갓생'을 찾아 헤매는 '갓생'들 (0) | 2023.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