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진다' 북칼럼
집단적 섬망을 물들이는 무궁화
아버지의 병환으로 대학 병원 입원실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었다. 지난 수년간의 간병생활로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꽤 익숙함에도 이곳 신경외과 병동에서는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다. 여기에는 갖가지 뇌 질환을 앓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외상으로 뇌 손상을 입은 후 인간의 본능만을 겨우 유지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성적인 표현과 욕설을 정제되지 않은 채로 주변 환자와 간병인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내뱉으며, 또 다른 이는 매우 폭력적으로 변하여 주변 물건을 집어 던지고 부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소음 차단 성능이 매우 좋은 헤드폰을 끼고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이를 뚫고 들어오는 욕설과 비명은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외상 후 뇌 기능의 상실 혹은 저하로 찾아오는 이러한 섬망(譫妄) 증세를 보이는 환자는 쉽게 흥분하고 공격적이며 자극에 과민 반응을 보인다. 지남력(指南力)과 이성의 개입이 현저히 떨어져 과거의 기억을 혼동하거나, 특정한 상황에서 적합한 말과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망각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전후(戰後) 일본이 패망한 것을 애써 잊어버리고 미국의 속국이 되기를 자처하여 현대의 일본으로 발전한 것이나, 해방 후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해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성장해온 한국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 극우 정치의 득세와 정치적 선전을 통해 일본의 젊은 세대가 위안부나 강제징용, 전쟁 범죄 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이나, 다케시마의 날 제정과 역사 교과서 왜곡 등의 정책적 수단을 통해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유 중인 곳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집단적 섬망’ 상태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따라서 우리 세대는 선행 세대가 봉인하고 매장한 과거를 파헤쳐 관 뚜겅을 열고 부패한 지하의 사체를 끌어내 그들의 말을 들은 다음 ‘이번에는 정말로 성불하십시오’라고 다시금 합장하면서 혼을 위로하는 의례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질고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쿠라 진다 中-
폭력에 대한 처벌이 중재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마땅한 처벌과 보상은 온전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책 ‘사쿠라 진다’의 일부분처럼, 소수라 할지라도 일본 내에서 고노 담화의 계승과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 및 배상에 이은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한일관계는 이와 정 반대급부로 흘러가고 있다. 2023년 3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한일관계 복원이라는 전 정부의 업적 지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허울마저 어색한 명분 아래 강제동원피해자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고 한일 정상회담에서 세계무역기구 제소를 철회한다고 선언했으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를 발표했다. 나아가 현 정권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방류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같은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를 명백히 침해하고 있는 민감한 사건에 대하여 적극적 대응을 자제하며 받는 것 없이 내어주기만 하는 매국적 외교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집단적 섬망 증상의 대처를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우리의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지금처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미래의 발전적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면 책 ‘사쿠라 진다’에서 지적했듯, 과거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서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일 수 없다. 우리가 먼저 국권 침탈과 민족 수난의 역사를 잊지 않고 그들의 행동이 부당했음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하며 지나간 아픈 기억을 보란 듯이 목에 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의 빠른 성장을 통해 세계의 최빈국 중 하나에서 일본 못지않은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위상은 눈부시게 변화했다. 발전된 문화의 힘은 다른 이들이 우리의 모습을 우러러보게 하며, 우리의 제품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soul)과 생각(mind)을 보고 배우고 싶게 만드는 무궁한 힘을 지녔다. 이는 국내외의 정치적 이해득실과 정권의 뒤바뀜에 따라 흔들리는 정치가 가질 수 없는 힘이 분명하다. 바로 이 백범의 꿈이었던 드넓은 문화의 힘은 끝끝내 벚꽃을 꺾는 영광을 쟁취하고 집단적 섬망 상태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먹과 칼과 총을 통하지 않은 고결하고 통쾌한 복수극의 찬란한 마지막 장면은 벚꽃이 진 자리에 무궁화가 피어나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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