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물' 북칼럼
이게 다 문재인 때문이다.
올해 여름에 오송 지하차도에서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이태원에서는 159명이 축제를 즐기러 왔다 참변을 당했다. 얼마 전 열렸던 잼버리대회는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해 행사의 시작부터 파행으로 치달았다. 해병대 소속의 채수근 상병은 안전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구명조끼 하나 입지 못한 채 수해 인명 구조에 투입되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부터 어떤 일이든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할 줄 모른다. 윗물이 더러운데 어찌 아랫물이 맑을까 싶다.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이들은 그저 가만히 서서 국민의 관심이 다른 사건으로 덮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자격 없는 이들이 책임질 위치에 자리해 있다. 이런 무도한 정권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부아가 치미는 것은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화가 나고 의문이 든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당하지 않는가? 왜 압도적 다수의 거대 야당은 무력해 보이기만 하는가? 촛불 집회에 참석하여 윤석열 탄핵을 소리높여 외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생각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애초에 이런 정권이 태어난 것 자체에 허탈감이 든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무책임한 정권의 탄생에 책임이 있는지를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책임이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당선된 선출직 공직자다. 따라서 이게 다 2번을 찍은 국민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국정을 운영할 줄 모르고 찍었다면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없는 것이고,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천공 스승이니 건진 법사니 하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는다는 소리를 듣고도 찍었다면 이런 상황 정도는 감수하는 걸까.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2022년 대선은 시대정신이 사라진 대선이었고, 국민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투표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겪는 것도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디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실망과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 절반씩이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더 쉽게 느껴진다.
일부 적극적 정치참여 계층은 이런 정부의 탄생 책임을 이전 정부와 특정 인물에 덧씌우려 하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검찰 권력 및 언론 권력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고, 너무 나이브 했으며, 윤석열을 스타로 키워 당선시킨 주범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믿지는 않지만, 그 주장의 취지는 100% 공감한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싶다. 그러나 주장에는 분명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의 일 처리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주장을 하고 아무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하지 않을 때, 여론은 형성된다. 사전 정보와 지식이 없다면 저 사람의 주장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반박하고 싶지 않은 주장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문재인은 죄가 없다’라고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민정수석비서관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조국은 그의 저서 ‘디케의 눈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7년 촛불혁명은 단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맞이해 진보와 중도 보수가 연합해 이루어낸 성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유승민, 김무성 등 당시 여당 새누리당 안의 ‘비박‘인사들이 동참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에 동참했던 합리적 보수 인사를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당시 이 발표를 들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탄성을 기억한다. 당시 범여권 내에서 “윤석열은 검찰주의자일 뿐이다“ 라는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윤석열은 검찰 내 ‘개혁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수사권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합의안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전해왔다. 윤 지검장은 검찰총장 후보 당시 청와대의 검증 인터뷰에서도 같은 뜻을 표명했다. 경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검찰개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180도 바뀌었음은 확인된 사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마이TV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총장이 된 후부터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그때 거짓말을 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완벽할 수 없다. 때론 행동에 따른 결과가 행위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타날 때도 있다. 시작의 의도가 불순했다면 비판 그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하겠다. 하지만 권력 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추고 펼친 정책과 인사가 반드시 그에 이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임을 당시 행정부의 수반에게 돌리는 것은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측면이 있다. 악행의 책임은 악행의 당사자에게, 현재 정치의 책임은 현재의 정치인에게 맡겨야 함이 당연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 그리고 책방 주인이 되었지만, 자신을 향해 확성기를 켜고 욕을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매일을 살아간다. 하지만 묵묵히 그것을 견뎌내며 지낸다. 윤석열 정부의 탄생에 가장 큰 책임을 진 사람이라는 결과론적 비판이 그를 따라다니고 현재의 정치적 사건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그의 책임의 시간은 이미 끝났다. 정치를 하지 않을 운명에서 정치를 할 운명으로 바뀌고,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 그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정치인으로서, 공직자로서의 삶을 국민에게 바쳤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누구보다 책임있는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 결과 헬조선이란 단어로 점철되었던 대한민국은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어 있었으며, 국가운영의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미증유의 코로나 팬더믹을 돌파하고 여당에 180석을 안겨주었으며,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국단위 선거에서 4번의 연승을 기록하고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기록했으며 처음으로 지지율 40%대를 기록하며 퇴임하였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의 책임을 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정치가 바뀌어야 검찰 공화국도 바꿀 수 있다. 미흡하긴 했지만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조정도 정치가 이뤄낸 것이다. 예로부터 독재권력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무시한다. 다만 국민이 가진 투표권의 행사를 두려워할 뿐이다. 국민의 정치참여만이 ‘대한검국‘을 ‘대한민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지향하면서 단계적으로 검경 간의 수사권 ‘조정’을 추진하고 성취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기 위해 검찰이 직접수사권을 행사하는 범죄를 담당하는 ‘중대범죄수사청‘법안도 발의되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시행령을 통해 이러한 모든 개혁을 무산시켰다. 2017년과 2019년 거리를 밝혔던 촛불시민의 요구는 중대한 일격을 맞았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러한 반동에 대해 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국민 앞에 엎드려 사죄한다. "
'디케의 눈물'에 실린 이 한 단락의 글에 우리 사회가 당면한 난망한 일에 대한 해답이 존재한다. 그 해답은 바로 '책임'에 있다.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감수한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나 절차 혹은 과제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는 데 있어 유효한 신뢰성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사과나 유감 표명 혹은 사퇴를 통한 책임을 지는 모습은 하나의 사건의 매듭을 짓게 한다. 나의 말의 무게를 알고, 나의 자리의 무게감을 느끼는 자가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더 나은 사람임을, 내가 가진 개인의 욕망보다 다 큰 가치임을 아는 국민이 더 많아지는 그 순간이 올 때,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위한 발걸음을 한 발 더 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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